「いただきます」の日本語に隠された深い真意
‘이타다키마스’의 일본어에 숨겨진 깊은 진의
‘이타다키마스’의 일본어에 숨겨진 깊은 진의
悪には懺悔し、感謝の気持ちを持って生きる
나쁜 일에는 참회하고, 감사의 기분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쁜 일에는 참회하고, 감사의 기분을 가지고 살아간다
TOYOKEIZAI
ONLINE 2016年12月19日
今回は「いただきます」について(写真 :Graphs
/ PIXTA)
이번 회는 ‘이타다키마스’에 대해서 (사진 :Graphs / PIXTA)
이번 회는 ‘이타다키마스’에 대해서 (사진 :Graphs / PIXTA)
浄土真宗本願寺派僧侶でありながら、通訳や翻訳も手掛ける大來尚順氏による連載『訳せない日本語~日本人の言葉と心~』。エンターテインメントコンテンツのポータルサイト「アルファポリス」とのコラボによりお届けする。
정토진종 혼간지 파 승려이면서 통역이나 번역도 다루고 있는 오오기 쇼우쥰 씨에 의한 연재 ‘번역할 수 없는 일본어~일본인의 말과 마음~’.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포탈사이트 ‘알파 폴리스’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제공합니다.
정토진종 혼간지 파 승려이면서 통역이나 번역도 다루고 있는 오오기 쇼우쥰 씨에 의한 연재 ‘번역할 수 없는 일본어~일본인의 말과 마음~’.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포탈사이트 ‘알파 폴리스’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제공합니다.
思い出のある「いただきます」추억이 있는 ‘이타다키마스’
アルファポリスビジネス(運営:アルファポリス)の提供記事です
알파 폴리스 비즈니스(운영:알파폴리스) 제공 기사입니다.
알파 폴리스 비즈니스(운영:알파폴리스) 제공 기사입니다.
日本人の習慣として口にする言葉のひとつに、「いただきます」があります。実は、この言葉は私の大好きな言葉のひとつです。実は、ちょっとしたエピソードがあります。
일본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는 말의 하나로 ‘이타다키마스’가 있습니다. 실은 그 말은 제가 좋아하는 말의 하나입니다. 실은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는 말의 하나로 ‘이타다키마스’가 있습니다. 실은 그 말은 제가 좋아하는 말의 하나입니다. 실은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私は小さな頃から、ごはんを食べるときは、テーブルに座り食卓に並んだ料理を目の前に、手を合わせ、大きな声で「いただきます」と叫び、母の「はい、どうぞ」という声を聞くまで決して食べませんでした。ときには、母が庭の掃除で外にいることもあり、その時は、外にいる母に聞こえるように張り裂けんばかりの声で「いただきまーす」と叫び、それに対して母も負けじと「はーい」という声を張り上げて返事してくれていました。そんな私と母の掛け合いの思い出ということもあり、この言葉を大事にしていました。
제가 어릴 적부터 밥을 먹을 때는 테이블에 앉아 식탁에 늘어선 요리를 눈앞에 두고 손을 모아 큰 목소리로 ‘이타다키마스’ 라고 외치고 엄마가 ‘하이 도우죠Yes, please’ 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결코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엄마가 정원 청소로 밖에 있을 때도 있어서, 그럴 때는 밖에 있는 엄마에게 들리도록 터져라 하는 목소리로 ‘이타다키마스’ 라고 소리치고, 이에 대해서 엄마도 질세라 ‘하~이’라는 목소리를 목이 터져라 답을 해 줍니다. 그런 저와 엄마의 말주고받기의 추억이란 것도 있고 해서, 이 말을 소중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부터 밥을 먹을 때는 테이블에 앉아 식탁에 늘어선 요리를 눈앞에 두고 손을 모아 큰 목소리로 ‘이타다키마스’ 라고 외치고 엄마가 ‘하이 도우죠Yes, please’ 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결코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엄마가 정원 청소로 밖에 있을 때도 있어서, 그럴 때는 밖에 있는 엄마에게 들리도록 터져라 하는 목소리로 ‘이타다키마스’ 라고 소리치고, 이에 대해서 엄마도 질세라 ‘하~이’라는 목소리를 목이 터져라 답을 해 줍니다. 그런 저와 엄마의 말주고받기의 추억이란 것도 있고 해서, 이 말을 소중히 하고 있습니다.
その後も、小学校、中学校、高校、大学、そして留学のためアメリカへ行っても、食前の「いただきます」は、変わらない習慣として大切にしてきました。今でも、さすがに「いただきます」と叫ぶことはありませんが、外食の際のお店でも、移動中の飛行機の中でも、どこにいようとも食事をするときは、必ず手を合わせて、「いただきます」を口にします。
그 뒤에도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그리고 유학으로 미국에 갔을 때도 식전의 ‘이타다키마스’는 변하지 않는 습관으로서 소중히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역시나 ‘이타다키마스’ 라고 소리치는 일은 없습니다만 외식을 할 때 가게에서도, 이동 중인 비행기 안에서도, 어디에 있든지 식사를 할 때는 반드시 손을 모으고 ‘이타다키마스’ 라고 말합니다.
그 뒤에도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그리고 유학으로 미국에 갔을 때도 식전의 ‘이타다키마스’는 변하지 않는 습관으로서 소중히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역시나 ‘이타다키마스’ 라고 소리치는 일은 없습니다만 외식을 할 때 가게에서도, 이동 중인 비행기 안에서도, 어디에 있든지 식사를 할 때는 반드시 손을 모으고 ‘이타다키마스’ 라고 말합니다.
そんな中、以前、こんなことがありました。ある時、仕事の出張でイギリスへ行くことがありました。長時間のフライトで唯一の楽しみは、食事です。その食事をいただこうと、いつも通りに手を合わせ「いただきます」と口にしました。すると横に座っていらしたイギリス人の方に、「素晴らしい」と日本語で褒められました。お話してみると、その方は日本にもう11年も住んでいらして、福岡の大学で英語を教えていらっしゃる方でした。私が機内であまりに堂々と手を合わせて「いただきます」と口にするものだから、驚いたそうです。
그런 가운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업무 출장으로 영국에 간 일이 있습니다. 장시간 비행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식사입니다. 그런 식사를 잘 먹겠다고 평소와 같이 두 손을 모아서 ‘이타다키마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 계시던* 영국 분이 ‘素晴らしい[/subarashi/ = Great – 옮긴이]’라고 일본어로 칭찬을 들었습니다. 얘기를 해 보니 그 분은 일본에 벌써 11년이나 사시면서, 후쿠오카의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기내에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손을 모아서 ‘이타다키마스’ 라고 말한 것이었기 때문에 놀랐다고 합니다.
* 왠지 이 문단에서는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만, 영국인에 대해서 계시다, 분과 같은 존경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 옮긴이
그런 가운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업무 출장으로 영국에 간 일이 있습니다. 장시간 비행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식사입니다. 그런 식사를 잘 먹겠다고 평소와 같이 두 손을 모아서 ‘이타다키마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 계시던* 영국 분이 ‘素晴らしい[/subarashi/ = Great – 옮긴이]’라고 일본어로 칭찬을 들었습니다. 얘기를 해 보니 그 분은 일본에 벌써 11년이나 사시면서, 후쿠오카의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기내에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손을 모아서 ‘이타다키마스’ 라고 말한 것이었기 때문에 놀랐다고 합니다.
* 왠지 이 문단에서는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만, 영국인에 대해서 계시다, 분과 같은 존경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 옮긴이
これがきっかけで、私は自分が僧侶であることも明かし、「いただきます」の意味をはじめ、日本文化について考えることになりました。そして、「いただきます」を英語にするとどうのようになるのか尋ねると、イギリス人の先生は、僧侶の立場からどのように英語にするのか興味深いので聞かせて欲しいと、逆に尋ねられました。その時、初めて当たり前のように使っていた「いただきます」の意味を深く考えました。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저는 자신이 승려라는 것도 밝히고 ‘이타다키마스’의 의미를 시작으로 일본 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타다키마스’를 영어로 하면 어떻게 될지를 물어보니, 영국인 선생님은 승려의 입장에서 어떻게 영어로 하는 지가 흥미로워 물어 보고 싶다고 역으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당연한 것처럼 쓰고 있던 ‘이타다키마스’의 의미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저는 자신이 승려라는 것도 밝히고 ‘이타다키마스’의 의미를 시작으로 일본 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타다키마스’를 영어로 하면 어떻게 될지를 물어보니, 영국인 선생님은 승려의 입장에서 어떻게 영어로 하는 지가 흥미로워 물어 보고 싶다고 역으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당연한 것처럼 쓰고 있던 ‘이타다키마스’의 의미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いただきます」の意味 ‘이타다키마스’의 의미
食前に口にする「いただきます」の意味を尋ねられると、一般的には食事を作って下さった方々への感謝だと答える方が多いと思います。もちろん、この感謝の気持ちも含まれていますが、実は真意はもっと深いものです。
식전에 말하는 ‘이타다키마스’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일반적으로는 식사를 준비해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라고 답하는 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감사의 기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실은 진의는 더욱 깊은 겁니다.
식전에 말하는 ‘이타다키마스’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일반적으로는 식사를 준비해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라고 답하는 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감사의 기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실은 진의는 더욱 깊은 겁니다.
本来「いただきます」の前には「いのちを」という言葉が隠されているのです。これを英語にすると「I take
your life.」(私は「いのち」を奪う)となり、ストレートでわかりやすくなります。つまり、私たち人間は、動物、野菜、空気の細菌やウイルスを含め、他のいのちの犠牲なくしては生きていけないのです。言い換えれば、私たちはさまざまな「いのち」に支えられて「生かされている」のです。
원래 ‘이타다키마스’의 앞에는 ‘いのちをinochiwo(목숨을)’라는 말이 숨겨져 있는 겁니다. 그것 영어로 하면 ‘I take your life’ (난 ‘목숨을’ 빼앗는다)가 되어 바로straight 알기 쉽게 됩니다. 결국 우리들 인간은 동물, 야채, 공기의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포함해서 다른 목숨의 희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은 다양한 ‘목숨’에 의해 지탱되어 ‘살고 있는’ 겁니다. *
* 어제 기사의 후반부 오므라이스의 각주에서 언급한, 영화 탐포포Tampopo의 초반에 라멘 경력 40년이라는 노신사가 젊은이에게 라멘에 얹은 차아슈우에 대한 경외를 이와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 옮긴이
원래 ‘이타다키마스’의 앞에는 ‘いのちをinochiwo(목숨을)’라는 말이 숨겨져 있는 겁니다. 그것 영어로 하면 ‘I take your life’ (난 ‘목숨을’ 빼앗는다)가 되어 바로straight 알기 쉽게 됩니다. 결국 우리들 인간은 동물, 야채, 공기의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포함해서 다른 목숨의 희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은 다양한 ‘목숨’에 의해 지탱되어 ‘살고 있는’ 겁니다. *
* 어제 기사의 후반부 오므라이스의 각주에서 언급한, 영화 탐포포Tampopo의 초반에 라멘 경력 40년이라는 노신사가 젊은이에게 라멘에 얹은 차아슈우에 대한 경외를 이와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 옮긴이
この意味を踏まえると、まず「いただきます」と口にして思うべきことは、「申しわけない」という他のいのちへの懺悔(ざんげ)なのです。すると自ずと頭が下がります。そして、そこから感謝が生まれてくるのです。ですから、一案として英訳は「I am
so sorry for taking your life and am greatly appreciate to be able to have your
life.」(あなたのいのちを奪ってしまい、申し訳ありません。有難くいのちを頂戴いたします。)と表現できると思います。
이 의미를 바탕으로 곧 ‘이타다키마스’라고 말하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申しわけないmoushiwakenai(미안하다)’라는 다른 목숨에 대한 참회(zanke)인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감사가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안으로서의 영역은 ‘I am so sorry for taking your life and am greatly appreciate to be able to have your life.’(당신의 목숨을 빼앗아 버려서 죄송합니다. 감사히 생명을 받겠습니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의미를 바탕으로 곧 ‘이타다키마스’라고 말하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申しわけないmoushiwakenai(미안하다)’라는 다른 목숨에 대한 참회(zanke)인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감사가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안으로서의 영역은 ‘I am so sorry for taking your life and am greatly appreciate to be able to have your life.’(당신의 목숨을 빼앗아 버려서 죄송합니다. 감사히 생명을 받겠습니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また、「いただきます」に漢字をあてるならば「頂きます」になります。「頂き」とは頂上を意味します。本来ならば、大切な他の「いのち」は尊敬の念を持って高いとこから授かるものです。しかし、実際に私たちが食事をしようとするとき、料理となって目の前に並ぶさまざまな「いのち」は、私たちの頭の位置より低い場所にあります。だから「いただきます」と言うときには、合掌しながら頭を下げて、他の「いのち」に対して尊敬の念を伝えるのです。実は、動作の中にも「いただきます」の真意が込められているのです。
또한, ‘이타다키마스’에 한자를 맞춰 보면 ‘頂きますitadakimasu’가 됩니다. ‘頂きitadaki’란 정상을 의미합니다. 원래라면 소중한 남의 ‘목숨’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높은 곳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이 식사를 하려고 할 때, 요리가 되어 눈앞에 늘어선 다양한 ‘목숨’은 우리들의 머리 위치보다 낮은 장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타다키마스’ 라고 말할 때는 합장을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남의 ‘목숨’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전하는 겁니다. 실은 동작 가운데도 ‘이타다키마스’의 진의가 들어 있는 겁니다.
또한, ‘이타다키마스’에 한자를 맞춰 보면 ‘頂きますitadakimasu’가 됩니다. ‘頂きitadaki’란 정상을 의미합니다. 원래라면 소중한 남의 ‘목숨’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높은 곳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이 식사를 하려고 할 때, 요리가 되어 눈앞에 늘어선 다양한 ‘목숨’은 우리들의 머리 위치보다 낮은 장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타다키마스’ 라고 말할 때는 합장을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남의 ‘목숨’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전하는 겁니다. 실은 동작 가운데도 ‘이타다키마스’의 진의가 들어 있는 겁니다.
「いただきます」を支える精神 ‘이타다키마스’를 지탱하는 정신
しかし、ふと思うことは、「いただきます」という深い懺悔と感謝の気持ちが込められた言葉が作り出された背景には一体何があるのかということです。私はここに、日本人の「凡夫」(ぼんぶ/ぼんぷ)としての自覚があるのだと思います。
그러나, 문득 생각나는 것은 ‘이타다키마스’라는 깊은 참회와 감사의 기분이 담긴 말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대체 뭐가 있나 하는 겁니다. 저는 여기서 일본 사람의 ‘범부’(bombu/bompu)로서 자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득 생각나는 것은 ‘이타다키마스’라는 깊은 참회와 감사의 기분이 담긴 말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대체 뭐가 있나 하는 겁니다. 저는 여기서 일본 사람의 ‘범부’(bombu/bompu)로서 자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凡夫」とは、仏教用語の一つで、「煩悩を断じていない愚かな私たち」のことをいいます。私たちというのは、煩悩(貪ること・怒ること・無知であること)を持つが故に自他共に傷つけながら生活しています。他を傷つけたくないと思っていても、結局は傷つけてしまうことや、結果的には傷つけてしまっていたということがあります。言い換えれば、私たちは巡り遇わせ(これを縁とも呼びますが)次第では、何をしでかすか分からないとても不安定な存在です。ここに人間の罪悪性があります。これが「凡夫」の姿です。
‘범부’란 불교 용어의 하나로, ‘번뇌를 끊지 못한 어리석은 우리들’을 말합니다. 우리들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탐내는 일, 화내는 일, 무지한 일)을 가지는 고로 자타 공히 상처를 주어가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을 해도, 결국은 상처를 주어 버리는 일이나 결과적으로는 상처를 주어 버린 적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은 돌아다니며 만나게 됨에(이것을 연이라고 부릅니다만) 따라서는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알 수 없는 매우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죄악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범부’의 모습입니다.
‘범부’란 불교 용어의 하나로, ‘번뇌를 끊지 못한 어리석은 우리들’을 말합니다. 우리들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탐내는 일, 화내는 일, 무지한 일)을 가지는 고로 자타 공히 상처를 주어가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을 해도, 결국은 상처를 주어 버리는 일이나 결과적으로는 상처를 주어 버린 적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은 돌아다니며 만나게 됨에(이것을 연이라고 부릅니다만) 따라서는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알 수 없는 매우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죄악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범부’의 모습입니다.
しかし、大切なことは、「凡夫」の自覚で終わらないことです。せめて意識できる目の前の悪に対しては懺悔し、感謝の気持ちを持って生活しようというのが、日本の素晴らしい精神なのだと思います。その精神の現れとして、「いただきます」という言葉と頭を下げる動作を生み出したのだと考えられます。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범부’의 자각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최소한 의식할 수 있는 눈앞의 악에 대해서는 참회를 하고 감사의 기분을 가지고 생활하자고 하는 것이 일본의 훌륭한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신의 표현으로서 ‘이타다키마스’라는 말과 머리를 숙이는 동작이 생겨났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범부’의 자각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최소한 의식할 수 있는 눈앞의 악에 대해서는 참회를 하고 감사의 기분을 가지고 생활하자고 하는 것이 일본의 훌륭한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신의 표현으로서 ‘이타다키마스’라는 말과 머리를 숙이는 동작이 생겨났다고 생각됩니다.
しかし、昔と比べると、今日の日本では「せめて意識できる悪」の認識の具合が低下しているように思えます。これは、「いただきます」という言葉の意味が表面的な内容でしか語られなくなっていることにも表れ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また、テレビ、インターネットなどのメディアを通して、信じられないような悲しい事件が目や耳に飛び込んできてしまう現実にも関係しているように思えます。
그러나 옛날과 비교하면, 오늘날의 일본에서는 ‘적어도 의식할 수 있는 악’의 인식 비율이 저하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것은 ‘이타다키마스’라는 말의 의미가 표면적인 내용으로서 밖에 이야기되지 않는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텔레비전, 인터넷 등의 미디어를 통해서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사건이 눈이나 귀에 날아들어 버리는 현실에도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옛날과 비교하면, 오늘날의 일본에서는 ‘적어도 의식할 수 있는 악’의 인식 비율이 저하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것은 ‘이타다키마스’라는 말의 의미가 표면적인 내용으로서 밖에 이야기되지 않는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텔레비전, 인터넷 등의 미디어를 통해서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사건이 눈이나 귀에 날아들어 버리는 현실에도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言葉だけではなく、その言葉の真意や精神をも引きついで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ただきます」という言葉の意味を考える中で学ばせて頂きました。
말만이 아니라, 그 말의 진의나 정신을 이어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이타다키마스’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배웠습니다*.
* 필자는 의도적으로 이타다키마스의 과거형인 ‘이타다키마시타’를 써서 学ばせて頂きましたmanabasete itadakimashita로 글을 마무리했는데요. ‘배웠습니다’ 라고 간단히 옮겼습니다만, 매우 어색합니다만 직역하면, ‘배우게 해 받았습니다/주셨습니다.’ 또는 ‘(상대방이) 배우도록 시키거나 허락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가 됩니다. 이런 ‘격조 있고 공손한’ 말투가 요즘은 오히려 옛날 쿄오토京都의 조정에서 사용하던 과장된 표현이어서, ‘사역 + 이타다키마스’ 대신 ‘~이타시마스(~합니다/~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과례過礼는 비례非礼라는 이야기죠. – 옮긴이
말만이 아니라, 그 말의 진의나 정신을 이어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이타다키마스’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배웠습니다*.
* 필자는 의도적으로 이타다키마스의 과거형인 ‘이타다키마시타’를 써서 学ばせて頂きましたmanabasete itadakimashita로 글을 마무리했는데요. ‘배웠습니다’ 라고 간단히 옮겼습니다만, 매우 어색합니다만 직역하면, ‘배우게 해 받았습니다/주셨습니다.’ 또는 ‘(상대방이) 배우도록 시키거나 허락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가 됩니다. 이런 ‘격조 있고 공손한’ 말투가 요즘은 오히려 옛날 쿄오토京都의 조정에서 사용하던 과장된 표현이어서, ‘사역 + 이타다키마스’ 대신 ‘~이타시마스(~합니다/~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과례過礼는 비례非礼라는 이야기죠. – 옮긴이
이타다키마스를 한자로 쓰면 기사에 나오는 頂きます 외에 戴きます라고도 씁니다. 戴로 쓰면 ‘머리에 이다, 받들다’라는 뜻이 되는데요. 바로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위에 계신 분 또는 텐노우가이 내려주시下さるkudasaru면 머리에 이듯 받든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정수리 뿐만 아니라 ‘얻다’ 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頂자를 쓰니 이렇게 깊은 해석이 가능해 지는군요.
한편 식사 후에 잘 먹었습니다 라는 인사는 ご馳走さまですgochisousamadesu라고 하는데요. 馳走chisou는 맛있는 음식이나 요리, 즉 진수성찬 또는 손님 대접을 의미합니다만, 한자를 보면 ‘달릴 치馳 + 달릴 주走’로 음식을 준비하시느라 분주하게 뛰어 다니셨습니다. 뛰어 다닌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라는 마음이 들어 있는 말이 아닐까요? 산과 강과 바다의 진미로 차려진 남도 한정식 한상을 보면 준비한 사람들이 고생했을 일이 떠올라 눈물이 난다는 얘기를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읽을 걸로 기억이 나서 다시 책을 펴 봤지만 찾을 수가 없네요. 아무튼 누가 한 이야기든 간에, 분명히 그 화려한 식재료를 찾아 산과 강과 바다를 헤매 뛰어다녔을 테고 부엌에서는 종종걸음을 쳤을 겁니다. 피눈물이 나도록…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변학도의 생일 상에 대한 이몽룡의 일갈처럼 말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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